훈구파는 경학을 중시하였고, 다른 학문에 개방적이며 포용적 태도를 보였다. 1/X
>훈구 - 사장학중시 / 사림 - 경학중시
영조 시기 환곡제를 면민이 공동출자하여 운영하는 사창제로 전환하였다. 63/X
>흥선대원군(고종)
순조는 삼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93/X
>철종, 임술농민봉기 후
㉠ 광해군 시기 진관 체제에서 제승방략 체제로 변경하였다. 29/X >명종
임진왜란 중, 제승방략을 폐지하고, 진관체제로 복구함
㉡ 인조는 도성을 수비하기 위해 기병과 훈련도감군의 일부를 주축으로 금위영을 설치하였다. 37/X >숙종
㉢ 효종은 호위청, 총융청, 수어청 등의 부대를 창설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40/X >인조
㉣ 정조는 서울 주변의 네 유수부가 서울을 엄호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82/O
세도정치기에 중앙 정치 참여층이 경화 벌열로 압축되고 중앙 관인과 재지사족 간에 존재했던 경향의 연계가 단절되면 서 전통적인 사림의 공론 형성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97/O
20. 다음 상소 이후에 나타난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윤집(尹集)이 상소하기를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원수입니다. … 지 난날 성명께서 크게 분발하시어 의리에 의거하여 화의를 물리치고 중외에 포고하고 명나라에 알리시니, 온 동토(東 ⼟) 수천 리가 모두 크게 기뻐하여 서로 고하기를 ‘우리가 오랑캐가 됨을 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 인조실록 -
① 소현세자는 청에서 서양의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천문관련 서적 등을 가져왔다.
② 조선은 청과 굴욕적인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③ 조선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과제로 삼았다.
④ 숭정처사(崇禎處士), 대명거사(大明居士)로 자처하며 출사를 거부하는 인물이 있었다.
병자호란(주전론)
정답 : ② 제시된 자료는 병자호란(1636) 당시, 윤집이 주장한 주전론의 내용이다.
② 정묘호란(1627) 때 후금과 조선은 화의를 통해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오답분석 :
① 병자호란 이후, 청에 인질로 잡혀온 소현 세자는 청의 문물 뿐만 아니라 아담 샬을 통해 서양 문물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③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복수설치), 임진왜 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④ 병자호란 이후, 김시온은 숭정처사를 자처하면서 은둔생활을 고집하였고, 이희량은 대명거사라 자처하며 관직을 거부하였다.